2014. 12. 4. 09:21ㆍ좋은 글 모음.
언제나 그렇듯 바리톤 김동규가 부르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가 올해도 가을의 휘날레를 장식했습니다.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가사에서 '너'를 뺀 자리에 '가을'을 넣어야 성에 찰 만큼 저는 가을 마니아입니다. 그동안 무엇에 쫓겨 헤매느라 이제서야 가을의 꼬리를 붙들고 목이 타는지 새삼스럽기 그지없습니다만 제가 너무 많이 늦었나요? 노래가 1절에서 2절로 넘어가는 간주 부분을 가수가 더러 휘파람으로 부를 때면 못 말리게도 흡사 슬픔의 절개지를 기어오르는 착각마저 듭니다.
계절을 시각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청각으로 감지하는 이도 있으며 저나 우리 딸 같으면 유독 후각으로 음미하는 쪽입니다. 길 위에 서서, 필경 코끝에 닿는 이 무렵 특유의 싸아한 냄새를 무척이나 즐기게 됩니다.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찐득하고 후끈한 열기에 도취한 듯 빠지게 되는 여름이 있다면 가을엔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타오를 것 같은, 그러면서도 그 불붙는 열정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들뜸을 잠재우는 가을만의 향기가 되어 마음을 위로하는 매력이 있지요.
나비 날개 같은 촉감을 지닌 계절의 황량함에 사로잡힌 채 한동안 멀뚱히 서 있곤 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찬란한 햇빛이 야트막한 들판에 있는 집집의 처마마다 꽃 등불을 내걸었던 게 기억납니다. 제가 워낙 여린 감정의 소유자라서인지 다 말라 바스러진 강아지풀들같이 주변의 소소한 것일수록 마음이 기우는 편입니다. 때론 갯버들가지 같게, 또 때론 고단해서 입술에 생긴 물집처럼 말입니다.
수첩을 보니 '방울토마토 덩굴 걷어내기'가 오늘 해야 할 일들의 첫 자리에 보입니다. 눈을 뜨면 들어오는 빨강 열매들은 저에겐 단지 여름 과일로서만 아니라 표현하기 쉽지 않은, 나름의 여름 냄새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어린 날 아버지가 잠 많은 저를 위해, 나팔꽃 덩굴들을 줄기줄기 엮어서 방 앞에 쳐주신 일종의 풀발이나 같은 그리움을 지닌 탓입니다.
한 계절의 끝자락을 놓칠까 봐 초조해하며 그 스산함을 의연하게 지나갈 수 없는 데는 또 다른 서글픔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들어 가까운 친지들 여러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엊그제도 시 때문에 방송국에서 자주 만나면서 알게 된 한 문인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연배도 저보다 6~7년쯤 아래이긴 하지만 삶에 대한 열정은 저보다 몇 배 치열했다는 점에서 애석하고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문득 영안실에 문상 온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저 관에 들어있는 시신이 만일 당신이라면 조문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말을 듣는 걸 가장 좋아하겠나? "그 질문에 첫 번째 사람은 '훌륭한 정치가'라고 대답했고 다음 사람은 '고명한 학자'를 꼽았습니다. 그렇게 말이 오가던 중에 세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 지금 움직였어." 그러니까 세 번째 사람 말은 그 많은 말보다도 '살아있길 바란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개똥밭을 구르는 한이 있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의 가장 큰 감동은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말고 또 그 무엇일까요.
가을이면 흔히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지요? 인생의 굵직한 것과 시시한 것들을 한번 나누어서 차근차근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통찰력이 찾아오는 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설악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제가 쓴 시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미로리(美老里)라는 마을을 처음 보고 와서 쓴 것입니다.
'설악산 저 후미진 곳에 굽은 허릴 누이고/ 착하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마을이 있습니다/ 설산을 찾아오는 이들을 볼 때면 주민들은 조바심을 합니다/ 밤낮으로 산의 정상에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다/ 끝내 생을 놓치면 어쩌나 끌끌 혀를 차곤 합니다/ 과연 저들 중 그 몇 사람이나 제 영혼을 더 높게/ 밀어 올리기 위해 갈망한 적이 있을까요/...'
달라이 라마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살며, 절대 살아보지 않은 것처럼 죽는다'고. 좀 더 조금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한겨울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설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볼 때처럼 세상 살아가기가 갈수록 불안해집니다. 마침 이달은 성당에선 위령성월로 지냅니다. 더 큰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연연해온 일상의 관심에서 벗어나 이제야말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을 위해 구령(求靈) 기도를 올리지요. 세상의 진미는 나의 소유를 다 덜어내 나보다 못 가진 이들을 위해 내주는 일이기에 말입니다.
젊었을 땐 나무의 키와 덩치만 눈여겨보았다면 이젠 그 나무가 자라서 드리우게 될 그림자의 크기, 넉넉한 그늘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을 위해 또 나의 어느 한 곳이 그 어디에 쓰일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각각 제 분수와 그릇에 합당하게 살면서 이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는 대신 그 누가 숨을 멈춰 저세상으로 갔는지를 묵상하는 계절, 그래서 길게 이어져 있는 가을 길이 아름다운지도 모릅니다. <시니어리포터 이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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