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심의 죄’ 혼빙간, 역사 속으로..

2012. 12. 12. 19:52세상사는 얘기

새 형법·성범죄특례법
‘친고죄’ 조항도 사라져
성범죄 대상에 남성 포함

형법 제304조.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009년 위헌 판정을 받은 혼인빙자간음죄다. 1953년 9월 18일 제정돼 59년을 이어온 이 죄가 11일 사라졌다.

 정부는 이날 김황식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를 통해 혼인빙자간음죄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공포했다. 형법 조항에서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을 완전히 삭제한 것이다.

 혼인빙자간음죄가 ‘유명세’를 치른 것은 제정 2년 후인 55년이었다. 당대의 ‘카사노바’로 불리던 박인수씨가 댄스홀에서 만난 70여 명의 미혼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박씨는 “내가 관계한 여성 가운데 처녀는 단 한 명이었다”고 폭로했다. 그해 5월 당시 1심 법원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공방 끝에 대법원은 유죄를 확정했지만 파문은 오래갔다.

 70~80년대 들어선 출세 후에 옛 애인을 버린 의사, 검사 등이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되는 일이 많았다. 84년 의사 조모씨가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하숙집 주인 딸을 버리고 몰래 장가를 갔다가 혼인빙자간음죄로 구속된 사례 등이 화제가 됐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사기 사건과도 인연이 깊었다. 명문대생, 의사, 검사를 사칭해 미혼여성을 농락하고 돈까지 챙긴 사람이 이 죄로 처벌받았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세태가 바뀌었고 혼인빙자간음죄로 인한 재판 건수는 크게 줄었다. 81년 한 해 269명이었던 기소 건수는 2007~2009년 99건에 그쳤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약 30명에 불과했다. 2002년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합헌 판정을 내렸던 헌법재판소가 7년 후 위헌 결정을 한 것도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셈이다.

 2009년 11월 26일 헌재는 혼인빙자간음죄에 위헌 판정을 내리면서 “남성이 결혼을 약속했다고 하여 성관계를 맺은 여성의 착오를 국가가 형벌로써 보호한다는 것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남녀 평등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국가 스스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혼인빙자간음죄 외에 성범죄 대상을 ‘부녀(婦女)’에서 ‘사람’으로 바꾸는 내용도 이날 형법 개정 공포안에 담겼다.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남성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법 조항 때문에 낮은 처벌을 받는 일을 없도록 규정을 손질한 것이다. 대신 강제로 유사성행위를 한 범죄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벌하는 ‘유사강간죄’가 신설됐다. 달라진 성범죄 양상을 형법에 반영한 것이다.

 성범죄 처벌 특례법에선 가해자를 처벌하려면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하는 ‘친고죄’ 조항도 사라졌다. 친고죄 때문에 성범죄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2차 피해까지 발생하는 문제 때문이다.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소지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강화됐다. ‘아동·청소년이나 아동·청소년으로 명백히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음란물을 갖고 있었다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조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