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7. 16:07ㆍ세상사는 얘기
▲ 무알코올맥주술 안 마시려고 버티는 자리에서 무알코올 맥주만 네 병째. 이게 뭔 짓인지.
통상 한국인은 관대한 음주문화를 가졌다고 한다. "한국인은 모이면 마시고, 취하면 싸우고, 헤어진 후 다음 날은 다시 만나 웃고 함께 일한다"라는 말이 그를 입증한다. 술 마시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은 회사원에 대해 미국인들의 55%가 "그 사람은 알코올중독자다"라는 의견을 가졌지만 한국인들은 모두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인의 음주실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주 3회 이상 마시는 사람들이 음주자 3명 중 1명이다. 마실 때 2차 이상 가는 사람들은 55%가 넘는다. 이것이 가장 고질적인 병폐다. 또 13%나 되는 사람들은 항상 3차를 간다. - 알코올상담센터 누리집 '한국인의 음주실태' 중에서
처음에 알코올상담센터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공감하며 기억해두었던 내용이다. 실제로 그 후로 주변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농담 삼아 건네보면 그 답은 한결같다. "술 마시고 다음 날 출근 안 하는 직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얼마나 속상하면 그랬겠어, 잘해줘라", "월급에서 까" 등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들뿐이었지, "그 친구 알코올중독 아니야?"라고 묻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알코올 의존 및 남용자들을 바라보는 부담스럽게 부드러운 시선이다. 이렇듯 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태도는 술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기 마련인데, 행여나 금주를 결심하고도 며칠 못 가서 포기하고 마는 대부분의 원인이 주변인들의 방해 때문인이라고 한다. '술 끊고 얼마나 오래 사나 지켜보겠다', '딱 한 잔은 괜찮다' 같은 한마디가 얼마나 암담한 결과를 초래할지 아는 이는 드물다.
50대 중반의 김씨는 5년간의 알코올 치료(입원 및 약물치료 포함) 후에 금주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술에 대한 갈망도 사라지고, 이제는 완전히 술에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하지만 그 즈음 주변 사람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한두 잔 정도는 건강에도 좋다네", "자네는 치료 잘 받아서 완전히 술 끊은 거 아닌가" 하는 강요 아닌 강요가 몇 차례 이어졌다. 예의상 혹은 분위기상 한두 잔 받아 마시기 시작한 김씨는 결국 다시 중독의 길을 걸었고, 요즘 다시 약물 치료를 받는 중이다. 치료 중간의 이탈 과정에서 직장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과의 거리도 멀어졌다고 한다.
"한 잔은 괜찮아" 한마디가 얼마나 암담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 맥주집 배경철망 안에 갇힌 맥주병들은 나의 정신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바닥을 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냐고 저에게 묻더군요. 그래서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죽거나 혹은 일어서거나의 선택 지점'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상태인 거죠. (알코올상담)센터에서는 이렇게 바닥을 경험하고, 죽음보다는 삶을 선택하신 분들의 상담과 재활치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상담일의 핵심 포인트는 '술자리를 무조건 피하라'다. 술잔이 오고가는 것을 정으로 착각하는 사회, 술잔을 거부하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술자리의 외압을 버텨내는 것은 본인의 의지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술에 대한 자제는커녕 타인의 금주 의지까지 희석시켜버리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술자리 분위기는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답이 없는 것이다.
단주를 결심한 순간부터 당신은 알코올중독자에서 알코올회복자의 길로 들어선다. 알코올 중독에 있어서 완치란 있을 수 없지만 완치에 근접한 단계는 알코올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단계이다. 알코올중독자의 경우는, 오늘은 누구랑, 어떤 안주로, 어느 술집에서 마실까, 늘상 이 생각뿐이다. 흐리거나 비오는 날에는 파전에 동동주, 티 없이 맑은 날에는 치킨에 맥주, 눈 내리는 밤은 언제나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잔, 생각의 회로는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
반면, 알코올회복자의 경우도, 늘 술을 회피할 생각을 한다. 오늘은 어떤 핑계로 회식 자리에서 빠질까?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합류하더라도 마시지 않을 만한 합당한 근거를 떠올리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알코올중독자와 알코올회복자의 경계는 선 하나 차이다. 한쪽은 술에 빠져들기 위해, 다른 한쪽은 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 순간의 흔들림이나 주변 분위기에 의해 경계는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금주를 결심하고 알코올회복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면 한동안 술자리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 구차하게 소줏잔에 사이다 따라 마시며 청승 떨지 말 것이며, 무알코올 맥주나 칵테일로 분위기나 맞추어야겠다는 치기 어린 욕심도 버려라. 홀짝거리는 습관부터 없애야 하고, 술을 억제하고 있다는 대단한 착각부터 지워내야 한다.
내 안에 수십 년 함께 살아온 술에 대한 갈망은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숨죽여 있다가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고 나를 삼킬 만한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이놈부터 굶겨 죽여야 한다. 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술에 대한 생각만으로 이놈의 갈증은 증대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코올 의존과 남용에서 벗어나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치료의 과정이 아닌 지난 삶 속에서 술과 함께 살아온 나를 놓아주는 과정이자 치유(힐링)하는 과정입니다. 그동안 술에 의해 가려지거나 과장되었던 선생님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두 번째 상담의 마지막은 그동안 술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과 앞으로 술 때문에 잃게 될지도 모르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마음 속에 저울 하나를 그려보고 한쪽에는 술을, 다른 한쪽에는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올려본다. 술 쪽으로 기울었던 무게중심이 서서히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면, 당신에게는 지금 술보다 훨씬 중요한 여러 가지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무엇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술 때문에 그것들을 잃어서도, 방치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술과 함께한 나를 놓아주는 '치유'의 과정"
▲ 맥주 최고의 안주, 먹태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맥주안주는 먹태라는 마른 안주다, 술을 부르는 요물.
오늘의 여담은 술자리 진상들이다. 필자 또한 해당되는 항목이 여럿 있으니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해석하지 말고, '내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구나'라는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삼기를 바란다.
진상의 기록, 첫 번째. 한(恨)민족 스타일. 특별히 서운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감정을 쌓아 놓고 사는 인간도 아니다. 방금 전 1차에서는 오히려 술자리를 유쾌하게 주도했다. 그러다 취하면 울기 시작한다. 뭐라고 말을 뱉긴 하지만 코 막힌 상태에서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하는 말은 세종대왕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다 새로운 안주가 나오면 눈물콧물 섞어가며 꾸역꾸역 집어 먹는다.
물론 주변에서는 주사가 시작되었음을 눈치 채고 서서히 한 자리씩 건너 공간이동을 시작한다. 울다 안주 먹다 술 마시다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수북하게 쌓아놓은 코 푼 휴지 더미에 얼굴을 처박고 잠이 든다. 한 많은 이 세상, 눈물로 씻어내는 것이 그만의 대처법이다.
두 번째. 무한반복 스타일. 처음부터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건 아니다. 날씨 얘기부터 주식 얘기, 상사 뒷담화까지 늘상 다양한 레퍼토리가 준비돼 있다. 하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가 상승함에 따라 어느 한 가지 대화에 '필(feel)'이 꽂힌다. 자신의 생각은 모두 옳다. 논리 따위 개한테 줘버린 지 오래다. 언성이 높아지고, "그게 아니고"로 시작하는 창시자의 설교는 시작된다.
문제는 그런 대화에 반박하는 또 다른 진상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제 둘만의 레이스는 시작된다. 눈치 챈 사람들은 재빠르게 등을 돌린다. 둘의 무한반복 대화는 정점으로 치닫고, 주먹다짐 직전의 상황에서 주변의 만류로 가까스로 떨어진다. 그러나 잠시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네버엔딩 스토리는 2차, 3차까지 이어진다. 진상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술자리 '진상' 유형 네 가지... 다시는 만나지 말자
진상의 술자리 주변진상의 주변은 사람들이 피하기 마련이다
세 번째, 돌직구 스타일. 평소에는 사람 좋은 동네 형, 오빠의 자태를 뽐낸다. 크게 잘못한게 아니라면 허허 웃어넘기는 대인배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알코올의 기운에 지배 당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인격도 가지게 된다. "너 그때 있잖아"로 조심스럽게 입을 떼면 주위는 순간 얼어붙는다. 그리고 수많은 화살, 총알 따위를 자동 발사로 퍼붓는다.
저 많은 얘기를 어떻게 담아 두고 있었을까,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다 육두문자까지 섞이고,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면 상대는 울기 일보직전이 된다. 이런 부류의 대부분은 말 끊는 것을 자존심과 결부지으며 거부하기 때문에, 빨리 앞의 잔을 채워서 쓰러뜨리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다. 위의 두 부류와 달리 술자리 시작부터 주위에 사람들이 앉기를 꺼려한다. 진상은 그래서 외롭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평등주의자. 내가 마신 만큼 그대도 마셔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니까. 술자리 내내 매의 눈을 하고 앉아서 상대의 술잔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자신의 잔을 내려 놓지 않는다. 장판(?)이 두껍게 깔리면 그 잔은 입에 대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절대 한 사람만 상대하지 않는다. 본인이 잔을 든 이상 옆 테이블의 일행들까지 파도를 타야 한다. 술은 빨리 먹어 없애야 하는 '악'이라 생각한다.
술잔을 비우고 나면 안주 챙겨먹을 겨를이 없다. 누가 잔을 안 비웠는지 부지런히 레이더를 돌려야 하니까. 그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치들의 특징은 주량이 세다는 것, 따라서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싫든 좋든 함께 마셔줘야 한다. 이런 부류의 또 다른 특징은 술자리 밖에서는 절대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상으로 소위 진상이라 꼽을 만한 네 가지 인간형에 대해 알아보았다. 어쩌나, 내 안에 이 모든 군상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우쳤으니 말이다. 이제 그대들에게 하나씩 날개를 달아줄테니 훨훨 날아가거라. 어디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지어다.
[오마이뉴스 이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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